토끼 이야기 - 지혜롭되, 경거망동은 삼가기를
등록일 2011.01.04 23:32 게재일 2011.01.05
이정옥 위덕대 교양학부 교수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 왕이 춘추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자 거절하여 옥에 갇혔다. 그때 고구려 신하인 선도해가 김춘추에게 넌지시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전한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즉 귀토지설(兎之說)이다. 문헌에 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토끼 이야기이다.
“토끼와 거북의 이야기를 아세요? 동해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어요. 의사가 토끼의 간이 명약이라고 하자 거북이가 토끼를 구하러 뭍으로 갔죠. 토끼를 꾀어 용궁으로 데려가서 간이 필요하다고 하자 토끼가 말해요. `나는 신명의 후손이라 종종 간을 꺼내어 말린답니다. 다시 돌아가서 간을 가지고 오도록 하죠` 어리석은 거북이 뭍으로 토끼를 데려오자 토끼는 거북을 놀리며 달아났대요. 어때요? 이 이야기를 들으니...”
춘추는 선도해가 이야기한 뜻을 대번 알아차린다. 바로 고구려왕에게 그의 청을 들어 줄 것이라고 얘기하고, 무사히 고구려에서 빠져 나와 신라를 돌아온다.
이 이야기에서 토끼는 위기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매우 지혜롭고, 영리하며 꾀 많은 캐릭터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 민중에 회자되면서 더욱 풍성하고 풍자적인 이야기로 완성되어왔다.
조선 후기 판소리`수궁가`나 소설 `별주부전`, `토끼전`이 그것이다. 어리석은 용왕, 충성스러우나 우직한 자라에 비하여 꾀 많고, 자신감 넘치며, 항상 유쾌한 토끼, 과도한 자신감은 넘쳐 자만심이 되고, 급기야 경거망동까지 일삼는 토끼로 변질되기도 한다.
또 하나, 일제강점기 우리의 민족 시인 윤동주는 우리 고전 속의 토끼를 시로 노래하기도 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 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윤동주 `간`>
1941년 11월29일, 윤동주가 연희 전문학교 졸업반 때 쓴 작품이다. 이 시는 각기 다른 동·서양의 두 고전을 형상화하였다.
즉, 거북이의 꾐에 빠져 간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토끼가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는 내용의 토끼 이야기와 인간을 위해 제우스를 속이고 불을 훔친 죄로 코카서스 산에 쇠사슬로 묶여,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다가 밤에는 그 간이 되살아나 영원히 고통을 겪는다는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교묘히 결합하여 현실적 고난을 극복하는 의지를 밝힌 작품으로 해석된다.
간이 등장하는 두 고전을 참으로 지혜롭게 결합한 윤동주의 시적 탁견을 볼 수 있다.
윤동주는 벼랑 끝에 몰린 위기에서도 슬기롭게 자기의 `간`을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 속죄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프로메테우스를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을 지키며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듯하다.
토끼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과 자신의 간, 즉 양심을 지키는 슬기로운 자아로 묘사된다. 한때 화려한 용궁의 유혹에 빠졌을지라도, 지상낙원은 내가 사는 바로 이곳이라는 토끼의 현실재인식도 확인케한다.
더구나 인간을 위해 불을 훔친 죄로 끊임없는 형벌을 감내하는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의 속죄의식과 결합되면서, 이 시에서 토끼는 우뚝 거룩한 양심과 정신의 소유자요, 욕망의 절제자요, 깨달음의 전령이 된다.
신묘년. 토끼해가 되자 토끼에 대한 덕담들이 난무한다.
고전 속의 토끼를 찾아보면서, 시대에 따라 변용되는 토끼의 이미지를 찾아봤다.
그러나 변치 말 것은, 더없이 지혜로울 일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토끼에서 더 나아가 자만하는 토끼가 되지는 말기를. 제 꾀에 제가 넘어지는 경거망동하지는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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